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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감각의 공간
- 김영진 작업론
김영진의 작업은 가상의 공간, 적확히 말하면 거주하는 장소로서의 (숨겨진) 방, 여러 방과 층으로 이뤄진 건축물, 건축물들로 구성된 도시(의 블록)에 관해 이야기한다. 작가는 각기 다른 공간 경험을 인터뷰 형식으로 서술한 <건물B의 숨겨진 공간 X02호>(2016)처럼 지면 위의 텍스트를 통해 공간을 상상하거나, 지면마다 하나의 문을 텍스트로 표기해 두꺼운 책을 만든 <Nygjnoiu street 333 building1>(2014)처럼 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공간을 이동하는 방식으로 건물의 구조를 상상하도록 한다. <보이지 않는 도시>(2017)는 책과 책이 설치된 사이를 이동하며 압축된 도시공간으로 그 경험을 확장시킨다.
책이라는 소재가 표면화된 일련의 작품들은 그 오브제성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실상 작가의 주요 관심은 공간과 이를 지각하는 방식에 있다. 작가가 독일 뉘른베르크 대학에서 공공미술과 개념미술 관련 전공을 하며 제작한 영상작업 <유랑하는 단어>(2015)는 길거리에 놓인 캔, 병 등 버려진 사물을 치우고 그 사전적 의미를 프린트한 종이를 그 자리에 대신 놓는 행위를 기록한 것이다. 이 작업은 공적공간의 장소들과 인지된 사물의 관계로 구성된 공간에 관한 것으로, 장소들을 인지하는 매체로서 언어를 통해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에게 경험으로서의 공간은 어떠한가?’
공간을 구축하는 비물질적/파편적인 재료
작가의 작업들에서 언어/텍스트는 시간성을 지닌 서사적 매체라기보다는 공간을 구축하는 비물질적인 재료에 가깝다. 혹은 공간에 관한 일부의 경험만을 유추할 수 있는 흔적으로서 기능한다. 작가가 2017년 이후 본격적으로 유리나 종이, 막대 형태를 설치하는 방식을 선보이는데, 이 또한 구체적인 일부의 묘사로 전체성을 상실한 채 모호한 추상적 공간을 보여준다. <접혀진 공간>(2015-2016)은 파편화된 공간성을 드러내는 초기 작업으로, “평면과 입체의 반복을 통해 공간을 인식하는 우리의 경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각목이나 드로잉을 가변설치하거나(<이어진 방들>, <38번 건물(170203-170315)) 포맥스로 기하학 입체도형을 만들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파편의 경치; 38번 건물>, 2017) 등 좀 더 직접적으로 공간성을 제시하는 일련의 작업들은 모두 건물 한 채 공간의 파편들을 통해 불완전한 경험을 제공한다.
한편 유리와 거울이라는 매체는 2018년 <1층 세 번째 복도 오른쪽 열다섯 번째 문>(2018)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인공파편>(2019) 등의 작업에서 사용되었는데, 재료가 지닌 투명함과 반영성(reflexibility), 쉽게 깨지는 특성은 시각적인 불안을 전달한다. 건축비평가 앤서니 비들러(Anthony Vidler)는 그의 저서 「건축의 낯선 두려움(Architectural Uncanny)」(1992)에서 유리가 외부의 조건들(낮/밤, 환한 빛/흐림)에 따라서 반사율이 바뀌고 소격 효과를 주는 거울과 같은 반영성으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유리는 물리적으로 공간의 안과 밖, 개방과 폐쇄, 투영과 배제의 이중성을 만들고 환영적인 공간 경험을 제공한다. 작가는 유리와 거울이라는 재료를 통해서 텍스트 너머의 감각들, 마치 현대인이 도시에서 경험하는 복합적인 감각들을 제시하고 있다. 유리와 거울의 특성을 지닌 재료들이 현대 도시의 건축물을 이루는 기본적인 매체라는 지점에서 작업의 공간개념이 점차 도시로 확장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의 작업은 이질성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새로운 공간을 창출할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기하학적이고 일관된 구조와 형식
작가의 작업을 이해함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매체와 재료를 최소화하고 기하학적이고 일관된 구조를 엄격하게 유지하는 작업형식에 있다. 텍스트를 페이지나 유리 등 사각 평면 위에 올리거나 면들의 조합으로 제작된 입체물, 건축물 공간의 일부가 평면적으로 보이도록 기록한 사진 등 그는 면적이고 기하학적인 요소를 최대한 활용한다. 구상성을 피한 미니멀한 형태와 컬러가 최대한 배제된 형식이 그것이다. 이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Le città invisibili)』(1972)을 연상시킨다.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 칸에게 자신이 경험한 다양한 도시들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된 책은 데칼코마니 마냥 각 챕터별로 여러 도시들이 서로 상응하는 구조를 지닌다. 총 55개의 가상도시들에 관한 텍스트의 전체 구성이 지닌 엄격한 구조와 형식은 챕터마다 각 도시에서의 경험을 묘사함과 더불어 도시공간에서 인지한 감각을 제공한다. 일관된 목차의 구조는 효율성과 합리성을 우선으로 하는 인간 문명의 결정체인 도시 자체를 의미한다면, 각 도시에 관한 묘사는 도시를 구성하는 개인과 그들의 관계가 지닌 무수한 감정의 레이어를 보여주는 듯하다. 이는 “기하학적인 합리성과 인간 존재의 뒤얽힘 사이의 긴장을 표현할 수 있는 보다 큰 가능성을 부여해 주는 상징”(이현경, 『보이지 않는 도시들』 작품해설, 민음사, 2016)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영진 또한 이러한 작업형식을 구현함으로써 도시로 확장된 공간에의 경험이 주는 합리성 이면의 삶의 부조리함과 갈등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더불어 “텍스트의 외적 구조는 엄격한 체계에 따라 계획되었지만, 텍스트의 내부는 다양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가 제시하는 가상의 공간들은 하나의 입구와 출구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람자가 작품 속 공간을 이동하며 다양의 의미의 공간성을 만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김영진 작가의 작업은 언어/텍스트를 매체로 삼아 공간을 구조화하고 유리나 종이 같은 평면적인 재료로 공간을 생성한다. 건축 구조 일부를 찍은 사진과 텍스트, 이를 발화하는 사운드(스피커), 그리고 공간의 부분을 이루는 평면들을 조합하여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설치작업들은 텍스트가 적힌 책 형태의 페이지 작업과 함께 공간의 구조 일부분에 대한 경험만을 제시함으로써 전체로서 파악될 수 없는 공간이 주는 불완전한 감각을 전달한다. 이는 곧 공간을 상상하는 이에게 불안정한 감각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유리나 거울과 같은 재료의 특성과 기하학적이고 일관된 작업형식으로 말미암아 도시공간에 관한 담론으로 확장될 잠재성을 보여준다. 관람자에게 삶의 터전인 도시공간에서의 감각들을 재경험하게 만듦으로써 작가는 궁극적으로 공간과의 관계 내에서 개인의 존재를 인식하도록 한다.
- 2020년 금호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수록 글 (202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