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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화된 일상에서 해방된 새로운 놀이의 예술
메가시티 서울의 넓은 땅덩어리를 관통하는 고가하부는 지역과 지역을 빠른 속도로 잇고 연결시킨다. 오로지 효율적인 이동수단을 위해 만들어진 이 길 아래 고가하부라 일컫는, 쓰임이 정해지지 않고 발굴되지 않은 가능성의 공간이 존재한다. 서울에 있는 180여개의 고가하부는 위치에 따라 그 특성이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한강변에 있는 고가하부는 운동을 하는 시민들이 잠시 쉬는 스팟으로 활용되고 횡단보도가 설치되어 지나가는 용도로만 사용되는 고가하부도 있다. 2017년부터 만아츠 만액츠가 주목하는 옥수역 고가하부는 아이들이 방과 후 잠시 들러 놀거나 부모들이 어린 자녀와 함께 걷고, 노인들이 가벼운 운동시설을 이용하는 등 가족 단위의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동네의 작은 광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곳에서 간간이 열리는 벼룩시장이나 공연의 사례처럼, 다수의 인원이 한데 모일 수 있는 잠재성을 지닌 공간이다. 이 곳은 옥수역 출구의 복잡함에서 한 블록 뒤로 물러나 위치하여, 이용자 주민들에게 일상의 지친 몸과 마음을 쉬어 가는 삶의 쉼터로서, 그리고 일상에서 해방된 작은 자유를 공유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만아츠 만액츠는 ‘신나는 예술 놀이터-PLAYFUL’이라는 올해의 캐치프레이즈 아래, 상반기에는 기존의 ‘휴식’과 ‘쉼’이라는 공간의 정체성에 훌라후프 모티브를 통한 액티브함(정크하우스 <Ring Ring Ground>)과 커뮤니케이션(엄아롱 <Under the Shade>)에 대한 관점을 제시하는 한편, 하반기에는 오늘날 도시적 삶 안에서 ‘놀이’라는 개념이 지닌 의미를 사유하는 계가를 마련해 보고자 했다. 여기서 놀이는 협의(狹義)의 놀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연관된다. 자본주의 하에서 재화의 가치로 점철된 일상은 극도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위해 삶 전반을 매뉴얼화시켰다. 골목문화가 사라진 아이들은 키즈카페에 가서 매뉴얼화된 놀이 서비스를 제공받는 한편, 개인을 자기계발의 주체로 격하시킨다. 자기계발서와 멘토링이 지난 몇년간 한국에서 중요한 화두였던 만큼 지속적이고 친밀한 관계의 부재는 나 답게 사는 법, 자발적인 삶에 대한 감각을 잃게 하고 보편적인 지침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놀이는 말초적인 감각의 유희가 아니라 노는 방법을 만들고 여러 사람들 간의 기초적인 룰을 만들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는 법을 배우고 고유한 삶의 공식을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신자본주의는 우리의 뇌와 마음에서 ‘수동성’의 덫을 씌우는데, 이는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Jacques Rancièr)가 지적한 수동적인 관객성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현실문화)과 『무지한 스승』(궁리)에서 연극의 관객성(spectatorship)이 지닌 수동적인 감상자의 태도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관객이 이미지에 의해 포박되지 않고 무언가를 배우며, 수동적인 ‘보는 이’로 머무는 대신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기를 주장한다. 이 철학자는 단순히 본다(looking)는 것은 안다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과 거의 반대가 된다고 설파하면서, 관객이 된다는 것은 수동적이며, 앎의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만큼이나 실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분리된다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연극을 예로 들었으나 시각예술작품을 바라보는 감상자 역시도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리고 우리의 삶 역시 제한된 프레임 안에서 천편일률적인 잣대와 공식을 그대로 적용하고 있지 않은가. 다시 예술과 놀이로 돌아와보면, 이 둘은 창의성(creativity), 즉 “전통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새롭고, 독창적이고, 유용한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과 연결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한국식 교육과 사회 하에서 만들어진 매뉴얼화 된 제도에 의지하는 개인들에게 예술과 놀이의 본질은 자율적 주체로 나아가는 일종의 틈을 만든다는데 있다. 따라서 본 프로젝트는 설치미술가 조재영과 산업예비군의 설치미술 작품을 통해 개방된 유휴공간으로서 옥수역 고가하부의 장소성을 기반으로 예술작품 설치를 통해 새로운 ‘놀이’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주체적인 공간활용에 대해 사유해보고자 한다.
산업예비군(김현준)은 <고가 밑 놀이터>라는 제목으로, ‘안전’과 ‘위험’이라는 놀이터의 특성을 재조명한다. 여러 미디어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서구에서 놀이터는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도록 디자인되어 아이들이 다치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한국은 결벽증적으로 안전 지향적인 놀이터를 만들기 위해 모두 비슷한 형태로 디자인되곤 한다. 작가는 이러한 한국식 놀이터가 지닌 안전과 위험이라는 개념의 허구성을 집어내기 위한 장치로 건설현장에서 사용하는 산업자재를 이용한다. 안전제일 문구가 새겨진 펜스나 낙하방지 그물망, 아시바 등은 모두 공사 현장을 떠올리게 하여 즉각적으로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그러나 이 재료들이야 말로 안전도 검사에서 최상급 점수를 받은 내구성을 갖춘 재료들이기에 실제로는 매우 안전하다고 한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느끼는 것과 실질적인 사실과의 괴리는 놀이터가 지닌 안전, 위험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넘어서 삶에 대한 태도에 질문을 제기한다. 어떠한 틈도 없이 매끄럽게 디자인된 놀이터에서의 안전한 삶이 과연 안전한 것일까. 넘어져도 일어나서 손을 털고 내 방식대로의 놀이를 만들 수 없는 지금의 놀이터에서 단발적인 유희 말고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한편 설치미술가 조재영의 미로 형태의 설치물과 다양한 사이니지를 이용한 설치작업 <Melody Road>를 선보인다. 산업예비군이 계단형태의 구조물을 통해 옥수광장의 기울기와 높이에의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면, 조재영 작가는 옥수광장을 가로지르는 동선에 개입하는 방식을 취한다. 총 3점의 구조물은 일정 유닛이 반복되며 확장되는 형태로 빨강, 노랑, 초록의 꽃잎 형상을 단순화시켰다. 구조물 위에 사이니지는 기하학적인 기호로 디자인되어, 이용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그널에 규칙을 부여하여 미로 안에서 자유로운 놀이를 만들어 보길 제안한다.
놀이와 삶이 매뉴얼화되면서 변칙와 이종의 재미가 사라진 오늘날, 옥수고가 하부의 설치작품은 이용자 주민들이 현재의 ‘놀이’에 대해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고 각자의 놀이방식을 만들어 주체적으로 고가하부 공간과 설치작품을 경험하도록 바라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올해 2회째 진행된 만아츠 만액츠의 옥수고가 아래에서의 PLAFUL 프로젝트는 여전히 기획취지가 주민들에게 닿기까지 아쉬움이 많다. 그러나 수동적인 관람자이자 개인이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이자 삶의 주인 되기는 도시의 유휴공간을 대하는 기획자, 예술가 그리고 주민이 함께 고민할 때 조금씩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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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아츠 만액츠 큐레이토리얼 에세이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