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지 않는 1
성남 원도심을 만들어 온 개인들을 찾아서
태평동에는 삶을 만들고 동네를 구성하는 무수한 개인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흔적을 장소에서 발견하고 현재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예술 프로젝트는 과연 가능할까. 태평동 빈집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 <사라지지 않는 1>은 예술의 개입으로 지역사회와 주민과의 접점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동시에 성남 원도심의 역사에서 중요한 이슈인 이주(移住)와 정주(定住),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이 지니는 위상에 관해 사유해보고자 한다.
높은 지대에 촘촘히 들어앉은 20평의 다세대 주택들, 좁은 골목에 교묘하게 주차된 차량들, 골목 점포들에서 풍기는 음식냄새, 평상과 의자를 내놓고 삼삼오오 모여앉은 노인들, 대문 앞에 조르르 놓인 화분들과 유난히도 많이 보이는 외벽에 걸린 거울들, 슈퍼 대신 공판장이라 적힌 간판들, 4명이 먹어도 충분한 15000원짜리 동태찌개. 성남 원도심에 위치한 수정구 태평동에서 마주친 생생한 삶의 풍경들은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옛 동네 모습의 현재 진행형이다. 1960년대 후반 국가 주도의 도시개발 계획으로 만들어진 이후, 이 곳은 누적된 시간들과 개인의 흔적들을 그 어느 지역보다도 잘 간직하고 있다. 그 이면에는 팍팍한 삶을 감내해낸 무수한 개인들이 있을 터이고, 하루를 살아낸 작은 영웅들의 이야기들이 장소 곳곳에 널려있다. 조선시대 ‘탄동’이라 불리웠다가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근심 걱정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뜻의 ‘태평동’으로 개칭되었다는 사실은 과거와 오늘을 잇는 이 지역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태평동의 시민로와 태평로 일대에 들어선 빈집에 들어가 보자. 대부분 2층짜리 주택이거나1층을 공판장이나 의상실, 미용실, 치킨집 등 가게로 사용하였던 곳이다. 집을 떠난 시점에서 멈춰있는 달력과 아이들의 그림이 벽면에 걸려있고, 화려한 꽃 벽지와 타일로 정성스럽게 꾸며놓은 방과 거실, 우풍을 막기위해 은빛 단열재로 벽을 덧대고 거울을 유난히 많이 걸어놓은 집 등 모두가 제각각의 얼굴을 하고 있다. 20평, 같은 규격 안에서의 삶이지만 이 집들을 스쳐간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삶을 꿈꾸고 살아갔을 터이다. 그들의 삶을 평면적으로 만드는 거시적인 관점, 거대담론에 가려졌던 개인들에 관해 다시 주목하고, 동네의 삶에 소소하게 스며들어 그들의 이야기를 발굴할 수 있다면? 태평 빈집프로젝트 <사라지지 않는 1>은 성남 원도심에서 여전히 삶을 만들고 동네를 구성하는 무수한 개인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들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다양한 예술방식을 선보이고자 한다. 성남문화재단이 운영하는 공공예술창작소의 입주작가들과 외부에서 초청된 작가들 및 주민이 협력하고, 성남시도시재생지원센터가 공간을 지원한 본 프로젝트는, 장소특정적 설치작업과 퍼포먼스, 커뮤니티아트 기반의 프로젝트와 골목 영화제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작업들로 구성되어 올해 6월, 10일간에 걸쳐 태평동 일대의 골목과 빈집을 채운다.
인근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가 방증하듯, 도시는 유기적인 생명체와 같아서 죽음을 맞이하고 새롭게 태어난다. 따라서 언젠가는 사라질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고 아카이빙하는 것은 예술의 중요한 행위이자 속성이다. 김달 작가는 신흥공공예술창작소에 입주한 2년간 신흥동과 태평동을 포함한 수정구 일대를 카메라로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구릉 지 위 용적률 기준에도 못미치는 빡빡한 간격의 20평 집들이 거미줄처럼 얽힌 전깃줄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풍경은 60년대 말-70년대 초, 이 지역이 형성되었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터전으로서의 집은 이 지역이 생겨난 배경에 자리잡은 이주(移住)와 정주(定住)의 이슈와 연결되기에 더더욱 중요한 주제일게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창훈 작가의 <무의미의 의미>(가제)는 도배라는 행위에 주목한다. 새로운 보금자리가 마련되면 사람들은 도배를 하면서 현재보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오랜 시간 고단한 삶을 함께할 집에 대한 감사와 애도를 표한다. 작가는 이제 곧 철거될 예정인 빈집에서 이러한 제의의 과정을 진행하고 기록함으로써, 집이라는 물리적인 공간 너머 거주에 관한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고자 한다. 보다 개인에 주목한 작품으로는 박혜수 작가의 사운드 및 설치작업 와 배민경 작가의 퍼포먼스로 구성된 <어둠속에 부르는 노래>가 있다. 어떠한 이유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살아가는 소외된 사람에 관한 작품으로, 빈집에 울리는 나즈막한 노래소리와 함께 전시기간 중 밤 시간에 한차례 퍼포먼스로 진행된다. 이 작업은 거대담론과 역사에서 깎여나간 나머지들, 수면 위에 드러나지 않은 지역사회의 많은 주체들과 그들의 지워진 목소리들을 연상시킨다.
한편 지역사회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각각의 주민들이 지닌 개인성의 단편을 모아 지역(의 일부)을 재구성해보려는 작업들도 있다. 서해영 작가의 <빈집살이>는 태평동 빈집을 작업실 삼아 최대한 많은 시간을 동네에 체류하면서 “티나지 않게” 그들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목표로, 미시적 관점의 개입과 관계맺기를 다양한 매체로 기록하는 작업이다. <태평프로젝트>는 지역 내에 거주 및 활동하고 있는 가천대 학생들로 구성된 가천프로젝트팀과
이원호 작가의 협업으로 기획되었다. 그들은 태평 2,4동의 좁은 골목에 놓인 거울, 시계, 화분, 의자 등 공유지와 사유지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오브제들에 주목하여, 물물교환의 방식을 통해 수집한 주민들의 물건들로 정원을 조성하는 실내 설치작품을 제작한다. 또한 주민이 직접 살고 있는 집을 그린 ‘집 초상화’ 아카이빙 작업은 집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과 감정의 조각들을 한자리에 모음으로써, 주거에 관해 개인성에 기반한 공동의 정서를 확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밖에도 옥상에 설치될 ‘태평등대’는 조명의 깜박임으로 언어를 구현하는 모스 부호에서 착안한 작업으로, 주민들에게 친숙한 장소인 옥상과 어두운 골목을 지키는 조명, 소통의 가능/불가능성을 실험한다.
사실 옥상은 이 지역에서 매우 특수한 장소성을 지닌다. 산을 깍아 만든 도시인 만큼 층층이 보이는 네모난 옥상들의 모습과 그 위에 다양한 삶들이 한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태평공공예술창작소의 성유진 작가는 주민들의 추억과 성남의 시간이 담긴 오래된 사진을 디지털 필름으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1970년대 성남이 너른 밭이자 황무지었던 시절을 지나 90년대 골목에서딱지치기하는 아이들이 모습에 이르기까지, 동네와 삶이 만들어진 개인의 역사가 한눈에 보인다. 작가는 이렇게 주민에게 말걸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대화와 이미지들을 통해 지역 삶의 단편들을 아카이빙 한다. 허수빈 작가는 <우리 옥상>이라는 동호회 프로젝트를 만들어 보다 실질적으로 옥상이라는 장소성을 탐구한다. 식물재배, 옥상다리 연결하기 등 옥상에서의 문화공간을 주민들과 함께 고민하고자 제안된 작가의 개인 프로젝트로, 태평 빈집프로젝트에서는 1회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다.
본 사업이 예술가들이 주축이 된 시각예술 기반 프로젝트이지만, 기획의 시작점에는 주민들 스스로가 자발적인 문화예술의 창작자이자 향유자로서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기를 바랐다. 지역 주민의 아이디어로 시작된 <골목 누워 영화제>는 실제로 약 20년전 실행된 주민의 문화예술 프로젝트 <8.15 골목영화제>에서 영감을 얻어 기획된 것이다. 애니메이션 상영과 오케스트라 공연으로 구성된 영화제는 골목의 언덕과 옥상에서 반쯤 누워 앉아 영화와 더불어 동네 풍경을 “새로이” 감상하는 의도를 지닌다. 한편 지역의 외국인 커뮤니티와 협업으로 진행될 음식나눔은 수면 위에 잘 드러나지 않는 지역사회의 주체들과 접점을 만드는 계기를 마련한다.
도시의 유휴공간을 이용하는 프로젝트는 결코 새로운 형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폐허의 공간이 지닌 날 것의 아우라와 장소특정적인 설치방식에 의해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동시대 예술의 전시방식 중 하나이다. 정부의 국가주요 사업으로서 도시재생이 주목받고 예술이 ‘공공성’에 관해 강요받게 되는 일련의 흐름 안에서는 더욱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본 프로젝트는 초현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폐허의 예술”로 이해되거나 “착한” 공공예술 프로젝트로 읽히는 것을 지양한다. 오히려 서울 도시사를 간직한 성남 태평동 지역의 빈집과 골목 안에서 실제로 몸을 담았던 사람들이 남기고간 흔적들, 그리고 과거를 딛고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소소하게 발견하기를 바란다. 이 지역에 발 붙이고 있는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과 오롯이 관계맺기란 애초에 불가능하고 미완에 가까운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여기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작가 나름의 방식으로 동네가 지닌 기억의 장소들을 기록하고 시간을 함께 공유하는 것일게다. 미약하고 소소하며 비생산적인 이러한 예술행위들이 모여 태평동을 만들고 있는 개인들의 삶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딛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 태평 빈집 프로젝트는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이다.
-
‘사라지지 않는 1’ 전시서평, 아트뷰 수록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