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
새로운 ‘모뉴먼트’를 향하여
- 장은경 작업론
“모뉴먼트의 목적은 ‘기억’이다. 사건 또는 인물을 기억하기 위해 물질적인 오브제를 만들어 세워둔다. 추모의 장소에 세워진 기념비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숙연함을 주지만 오브제가 가진 물질성이 너무 강압적으로 느껴진다.”
-작가 노트 중 (2016)
모뉴먼트(monument)의 목적은 ‘기억’이다. 여기서 ‘기억’이란 편집된 기록이다. 수많은 이야기로 점철된 시간의 축에서 승리자 혹은 정복자의 잣대에서, 기본적으로는 인류의 관점에서 바라본 몇 개의 점(업적)들로 선별되고 구성된 것이다. 작가 장은경은 모뉴멘털(monumental)의 ‘고귀함’, ‘위엄, ’영원성‘, ’물질성‘ 대신에 보조적이고 주변적이며 가변적, 비물질적이라 치부되었던 것들, 그래서 기념비로 소환될 수 없어 기억할 수 없었던 것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 기록한다. 그리고 기념비적인 대상들 이면에 존재하는 기억을 드러내어 경험할 수 있도록 장소특정적 설치와 영상, 그리고 책 형태의 페이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주변적이고 가변적인 대상의 모뉴먼트
장은경 작업에서 빛과 바람, 향기 등 자연현상은 작업의 주요 모티프 중 하나이다. 주변적이고 가변적인 대상으로서 이들을 어떠한 방식으로 기록할지, 공감각적인 경험을 어떻게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예술작품(의 형식)으로 변환시킬지에 관한 관점이 작업의 주제가 된다. 비교적 초기작에 해당하는 <빛의 조각-Archive>(2015)이나 바람과 향기 조각으로 구성된 <자연조각 시리즈>(2017)는 모두 비물질적인 자연현상을 기록하고자 오브제화시키는 시도이다. 일정 시간대의 빛의 변화를 건물 벽면에 형태적으로 기록하거나 희석비율의 차이로 향기의 대비를 도자 안에 담아내기도 한다. 바람의 명칭, 속력, 방향 등의 정보를 종이조각으로 제작하거나 풀에 나부끼는 잎새들의 위치를 점으로 표시한 영상작업(<무제>, 2019) 등은 모두 현상들의 정량화와 수치화를 시도하여 오브제화하여 기록한다.
<모뉴먼트 조각>(2016)은 공동묘지 비석 주변의 온도와 습도, 빛과 그림자, 냄새 등 공간을 구성하는 환경적 요소에 주목한 작업이다. 이처럼 중심이 아닌 주변적이고 비물질적인 것들을 모뉴먼트화시키는 일련의 작업들을 통해 작가는 우리의 세계와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주변적인 요소들을 인지하도록 하고, 그 이면의 가치에 대하여 반어적인 어법으로 그려낸다.
기념비적인 장소의 감각적 경험
작가의 근작에서는 역사적이고 시대상을 반영하는 건축공간에서의 프로젝트가 비중 있게 진행된 바 있다. 80~90년대 서민휴양지의 대명사였던 부곡 온천 지구의 호텔들을 다룬 <부곡 환타지>(2018)나 일제강점기부터 ’연초제조장‘으로 사용된 바 있는 수창청춘맨숀에서의 <사라진 벽-감각의 암호화 또는 벽의 암호화>(2019), 그리고 추사가 유배되었던 옛 가옥에서 진행된 <바람과 x, 빛과 x>(2019)가 대표적이다. 이 기념비적인 장소들에서는 공간이 지닌 시간의 흔적들과 중첩된 기억을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연초제조장 직원숙소에서 전시공간으로 용도 변경되면서 허물어진 공간 내부의 벽들에 주목한 <사라진 벽>은 설치작업과 더불어 책 페이지 작업이 병행되었다. 작가는 <부곡 하하하 호텔>에서 부곡 온천지구 호텔들에 관한 아카이브와 더불어 단편소설 <부곡 환타지>를 통해 시대를 관통했던 지역의 장소가 지닌 개인들의 기억을 소환한 바 있다. <사라진 벽>에서는 텍스트 대신에 허물어져 사라진 106개의 벽들을 1/500으로 축소하고 재조합하여 미로로 엮어내 페이지에 담았다. 장소가 지닌 기념비적 위상에 관한 설명적 텍스트를 걷어냈다는 점에서는 앞선 단편소설과 비슷하지만, 이 작업에 이르면 지면 위 미로를 따라 이동하며 기억으로만 남게 된 공간에의 경험을 연상하도록 한다. 보이지 않는 벽의 위치를 표시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워지도록 설계한 설치작품은 장소의 건축 내 벽들의 지리적 요소(정보)가 점차 탈락되고 장소를 기억하는 감각적 요소로 전이된다.
“우리 뇌의 해마에는 위치를 기억하여 추적하는 gps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세포가 있다. 이전에는 장소세포에 위치만 저장된다고 알려졌었는데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위치에 대한 정보와 더불어 감각 역시 암호화되어 함께 저장된다고 한다. 공간에서 느끼는 청각이나 촉각 같은 감각 장치도 장소를 기억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공간과 감각은 어우러져 기억된다.”
– <사라진 벽> 서문 중 (2019)
장소에의 기억에 있어 공간에서 느끼는 청각이나 촉각과 같은 감각이 중요하다는 작가의 관점은 추사의 유배지 가옥 설치작업에서도 드러난다. 작가는 이 오래된 가옥 공간을 경험하도록 자연현상을 끌어들이고자 공간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가옥 바깥과 내부공간 사이에 진자와 프리즘을 설치하여 변화하는 바람과 빛의 요소에 의해 공간의 내외부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이러한 감각이 공간 지각 경험에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풀어내고 있다. 또한 건축 내부에 자연으로부터 파생된 작품을 설치함으로써, 바깥의 바람과 빛(자연)이 진자와 프리즘(인공과 과학)을 거쳐 내부공간의 작품(예술)으로 이어지며 공간 안에서 개념적인 세 요소의 상관관계를 표현하였다. “에너지 보존 법칙의 진자가 전이 공간에 놓임으로 자연의 에너지가 예술로 전환될 때의 이동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라는 작가의 설명은 가변적인 대상을 예술작품으로 어떻게 치환할 것인지에 관한 작가의 지속적인 주제의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작업에서 책의 지면을 다루는 페이지 작업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념비적인 장소를 공간의 경험으로 치환시키기 위해 활용되기도 하고, 또는 주변적이고 가변적인 대상의 오브제화를 위해 제작되기도 한다. 처음 페이지 작업이 등장한 <흐르다>(2014)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호수와 나뭇잎의 색이나 물이 흐르는 모양과 소리 등 자연현상을 언어로 표현할 때 생겨나는 분절과 단절을 플립 북 페이지 안에 시각적으로 담아낸 작업이었다. 최근작 <달과 땡땡이>(2019)는 자연물인 달과 달을 복제한 형상이자 인공물인 땡땡이에 관한 작업이다. 달을 해석하는 땡땡이는 인공물이자 결국 해석의 영역으로서의 예술을 상징하는 것이다. 본 작업은 이러한 작가의 관점이 한 권의 책에 담겨 오브제, 즉 예술작품의 형식으로서 표상된다.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통해 작가는 예술이 지닌 전통적인 어법인 모뉴멘털과 인간 중심적 기록(역사)에서 탈락한 가치에 대해 재사유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 2020년 금호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수록 글 (202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