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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미래를 '지금 여기'의 삶으로
- 공공예술 워크숍 단상
서사의 위기
개인적으로 챗지피티(ChatGPT)나 바드(Bard)와 같은 인공지능 챗봇을 활용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키워드 리서치나 텍스트 요약이 필요할 때 아주 유용하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도구들을 사용할 때마다 꺼림칙한 기분을 지우기 어렵다. 한 기사에 따르면, 챗봇의 윤리성을 강화하기 위해 케냐인들이 시간당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온라인 상의 각종 표현을 걸러내며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1] 전 세계가 인공지능이 열어준 장미빛 미래에 환호할 때, 고통을 겪는 고스트 워커들(Ghost Workers)의 존재는 나에게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인공지능 챗봇의 편리함은 이러한 감정을 가볍게 넘어선다.[2]
우리 대부분은 도시가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있다. 케냐 사람들의 고통보다는 한 끼 식사나 주말에 놀러갈 장소를 더 고민한다. 정보 과잉의 네트워크 속에서 차분하게 귀 기울일 시간은 없다. ‘좋아요’ 숫자 앞에서 끊임없이 대체되는 파편화된 스토리 속에서 개인의 서사는 사라진다. “개인은 각자의 이야기, 즉 서사를 잃고 우연성에 휩싸인 채 폭풍우 한가운데서 부유한다.” 서사가 중요한 이유는 나로부터 시작된 이야기야말로 도시의 문제와 같이 추상적인 이슈를 ‘지금 여기’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와 도시 사이의 연대감을 가져오며 변화의 가능성으로 연결된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떻게 개인의 서사를 되찾을 수 있을까? 이 근본적인 질문은 오늘날 공공예술이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사회참여적 성격을 지닌 이 예술은 대중과 시민의 주체적 참여 및 개입을 독려함으로써 다른 시각예술과 차별화된다. 건축물 앞 조형물이나 벽화처럼 도시 재생과 미화 사이에서 체제의 프로파간다를 수행하는 방식을 넘어서, 많은 프로젝트들이 인권과 배리어, 마이너리티 이슈를 다루며, 기후위기, 공동체의 와해와 같이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지역사회의 문제에 주목한다. 공공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형태로부터 공적 영역에서 담론을 만들어내는 공론장이자 커먼즈로서의 도시 공동체를 실험하는 방향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해 자주 쓰이는 전략이 바로 워크숍이다.
우리는 왜 기후변화를 외면하는가
기후위기는 도시의 미래를 거론하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화두이다. UN의 지속가능 개발 목표(SDGs)에서도 2016년부터 30년까지 전 세계가 주목해야 할 키워드 17개 중 하나로 ‘기후행동(Climate Change Action)’을 꼽았다. 팬데믹을 거치며 인류의 환경 오염에 대한 자성하는 목소리와 함께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다.[3] 그럼에도 기후변화가 실제로 얼마나 체감되는지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답하겠는가. 기후변화 전문가 조지 마셜(George Marshall)은 “강렬한 감정적 서사가 이성적인 과학 데이터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며, 감정적 뇌를 다룰 것을 권한다.[4] 갖가지 정보와 스토리 대신 서사에 집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에 기후위기 이야기를 생산하는 워크숍 기반의 공공예술 프로젝트 <릴레이액션: 기후위기 책 만들기>(2022-2023)가 기획되었다.
문학에서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글(책)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Sci-fi’에 ‘Climate’을 더해 만들어진 ‘클라이파이(Cli-fi)’는 기후변화를 다루는 문학 장르를 의미한다. 은유와 서스펜스, 위트와 감동 등 문학적 서사가 주는 몰입감은 기후위기에 대한 공감대 형성에 탁월하다. 그러나 시각예술을 다루는 공공예술에서 문학을 본격적으로 차용한 이유는 한 해 전의 작업에서 기인한다. 사운드 아티스트 윤수희는 단편소설 3편과 사운드트랙 3편으로 구성된 작업 <앓는 소리들>(2021)을 통해 기후가 변한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주인공 춘식의 경험을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해변 인근 도시의 침수’, ‘흔들리는 기차’, ‘중저음의 굉음’, ‘무너진 건물’, ‘물병에 돋아 있는 싹’ 등 텍스트 안의 구체적인 이미지와 낯선 사운드를 중첩하는 융합적 예술 형식의 실험이었다. 기후위기는 가시적 변화나 노력의 성과가 쉽게 보이지 않아 외면받기 쉬운 아젠다이다. 이러한 편향적 사고에 관한 작가의 예술적 솔루션은 직접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나의 서사를 담은 기후위기 책 만들기
<앓는 소리들>에서 보여준 작가의 문제의식과 접근 방식은 <릴레이액션>의 출발점이 되었다. 2022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총 10회에 걸쳐 진행된 기후위기 글쓰기 및 사운드 트랙 제작 워크숍에서는 문학평론가 박혜진, 소설가 김기창, 편집자 김희진과 사운드아티스트 윤수희가 ‘기후위기 감수성’을 일깨우고 개인의 삶과 기후위기를 연결시키며 텍스트와 사운드 생산을 도모했다. 시각예술가, 안무가, 작곡가, 영화감독, 철학도 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자 10여 명이 함께 참여했다. 기후위기 주제의 창작물에 영감을 얻고자 참여한 사람에서부터 사운드 기술을 배우고 싶다거나 다른 사람들이 기후위기에 어떠한 태도로 접근하는지 궁금해서 참여했다는 사람까지 워크숍 참여의 이유는 실로 다양했다. 또한 디스토피아로 귀결되는 이야기 대신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고민하는 이도 있었다. 글쓰기 작업까지 무난하게 따라오던 참여자들도 사운드 워크숍에서 기술적 난이도의 차이로 인해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소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진행된 워크숍 과정은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책을 만드는 웹 프로젝트로 확장되었다. 워크숍 과정에 기반한 웹사이트인 www.relayaction.com은 누구나 언제든 참여할 수 있는 참여형 융복합 콘텐츠로, 쓰기와 듣기, 그리기의 행위를 결합하며 워크숍의 성과물을 전시하는 온라인 공간이다. 첫 화면에서 책들이 방문객에게 반응하며 움직이고, 이제까지 제작된 책들이 아카이브되어 있다. 한권을 클릭하면 책을 열어볼 수 있다. 우측 하단의 ‘책 만들기’를 클릭하면 직접 책을 만들 수 있는 페이지로 이동하며, 김희진 선생님의 글쓰기 워크숍에서 나온 사전질문이 가이드로 제시된다.
- 기후위기라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그림과 단어가 떠오르나요?
- 최근 환경문제에 대해 접한 가장 충격적인 정보는 무엇인가요?
- 환경 문제와 관련해 선택하고 실천한 구체적인 행동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기후위기와 비인간 존재에 대해 생각하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 1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기후위기와 관련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 30년 후 우리의 기후는 어떤 상태일까요?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요?
당신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100자 이상의 텍스트를 작성하면 된다. 또한, 제목과 저자명을 기재하고 텍스트와 어울리는 사운드를 선택하며, 원하는 이미지를 업로드하여 커버 이미지를 자체 제작함으로써 자신만의 개성이 묻어나는 책을 제작해보자. 온라인 작업장이자 서가에는 현재 『2070년의 뚝섬』(나나), 『뻐 끔 궤 도』(유호정), 『X의 X』(손희서) 등 23권의 책이 꽂혀 있다. 이 곳에 책이 50권, 100권, 1000권 쌓이는 동안 우리 앞에 도래할 도시의 모습은 점차 명확해질 것이다.
1인분의 삶을 위한 감각 깨우기
웹툰 『혼자를 기르는 법』(김정연)은 자립과 취업을 위해 가족을 떠나 생존과 자아실현으로 고군분투하며 홀로 사는 젊은 여성 주인공의 이시다의 삶을 그린다. 햄스터 ‘쥐윤발’과 동거하며 사람이 그립지만 때론 귀찮기도 한 인물이다. 2015년 시작된 이 웹툰은 1인가구에 관한 인식 변화와 함께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리적이고 사회적인 이유에서부터 개인 중심적인 가치관으로 이동하며 1인 가구가 새로운 삶의 형태로 받아들여진 것이다.[5] 이 웹툰은 1인가구의 현실을 유머러스하면서도 리얼하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성남에서 진행된 공공예술 워크숍 <혼자를 잘 기르는 시간> (부제: 지금이 문득 막막하고 심심한 사람들의 위한 워크숍)은 이시다와 같이 1인분의 삶을 사는 지역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일면식 없는 지역의 1인가구 청년 5명이 모여 신체의 다양한 감수성을 일깨우는 예술활동을 약 7주에 걸쳐 온오프라인으로 진행하였다. 움직임 마스터 헤라 김성원, 시각예술가 강지윤 및 전혜주에 의해 진행된 오프라인 워크숍은 몸 움직임, 청각 관찰 및 바람수집 등을 다루었다. 또한 온라인에서 낭독 워크숍을 통해 참여자들은 서로의 목소리를 익히며 한 권의 책을 읽기도 했다. 이 모든 활동의 결과물로서 참여자들의 퍼포먼스가 촬영되어 한 편의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퍼포먼스 영상 <숨>(2021)은 호흡을 질료로 삼아 타인의 숨과 자신의 숨을 더해 하나의 소리 풍경을 만드는 작업이다. 두달 가까운 시간동안 서로의 몸짓과 목소리로 만나고 시각이 아닌 청각과 촉각으로 외부를 느끼는 워크숍의 경험이 쌓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강지윤 작가는 코로나19가 범람하던 당시를 ‘호흡 곤란의 시대’라고 명명했다. 생명과 살아있음을 의미하던 ‘숨’이 삶을 위태롭게 만드는 감염의 매개가 된 시대에서, 다시금 그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바로 타인의 숨소리를 경청하면서 나의 호흡을 맞추는 연결의 감각, 그리고 타인의 동선을 고려하는 적절한 ‘거리두기’의 감각이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워크숍의 과정을 통해 새롭게 발견하고 체화된 것들이었다.
자기표현이 모여 만드는 창발적 공동체
오늘날 예술은, 특히 공공예술은 단순히 예술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공공예술은 물리적 환경 조건에 유연하게 반응하며, 시민 및 지역 주민, 참여자, 관객과 상호작용을 통해 개입의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과정의 예술이다. 이러한 이유로 워크숍은 그들이 예술에 개입하도록 만드는 주요 전략이 된다. 워크숍은 참여자의 개별 창작 과정일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하나의 의제를 향해 통합된 예술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때 참여자 각자의 개성이 합쳐져 창발적인 무언가가 생성되기도 한다. 참여자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지식이나 기술을 실천적, 체험적으로 학습하는 수련의 과정이지만, 주체적으로 자기표현의 결과물을 만든다는 점에서 워크숍은 다른 여타의 예술 프로그램과 차별화 된다. 또한, 워크숍은 연대의 장소로서도 기능한다. 동일한 목표를 갖고 함께 결과물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공감대가 형성되며, 기후위기나 1인가구와 같이 도시가 당면한 문제이자 사회적 현상을 개인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타인과 연결함으로써 연대의 힘을 확인할 수 있다.
공공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영향을 끼친 기획자이자 예술가인 수잔 레이시(Suzanne Lacy)는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 스튜디오 생산의 바깥으로 이동하여 일종의 공동체 과정이나 혹은 제도와의 협상이 될 때, 예술이 사회의 동학에 응답하고 타자의 필요에 접근해야만 할 때, 그것이 본질적으로 협업적 성격을 가질 때, 혹은 그것이 타 분야 전문가에게 의존할 때, 예술은 일종의 좀 더 열린 유동적인 과정이 된다.” [6] 워크숍은 이러한 공동체적 과정이자 참여자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협업적 활동이며, 참여자 각자의 개성이 합쳐져 새로운 창작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개인의 이야기에 주목할 때, 도시의 문제들이 구체적인 서사로 다가와 현실적으로 논의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예술 활동이 우리에겐 더더욱 필요하다.
- 민음사 릿터 Littor 45호 <워크숍 시대> 수록글 (2023)
[1] 2023년 1월 18일자 타임지의 기사 OpenAI Used Kenyan Workers on Less Than $2 Per Hour to Make ChatGPT Less Toxic는 인공지능 챗봇에 관한 전 세계적인 열풍 이면에 존재하는 실상을 드러내며 큰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 기사는 온라인상에 범람하는 성학대⋅자해⋅폭력⋅증오⋅편견 등 혐오 및 차별 표현을 레이블링 해야 하는 케냐인들의 인권에 관해 보도하고 있다.
[2] 한병철, 『서사의 위기: 스토리 중독 사회는 어떻게 도래했는가?』, 다산초당, 2023
[3] 서울연구원의 설문에서 ‘코로나19이후 어떤 현상이 계속될까’라는 질문에 64.1%가 ‘기후위기 및 환경오염에 대한 관심 증대’라고 답했다. (「코로나19가 바꾼 시민생활」, 서울인포그래픽스, 2020.10.12)
[4] 조지 마셜(이은경 옮김), 『기후변화의 심리학 - 우리는 왜 기후변화를 외면하는가』, 갈마바람, 2018
[5] 서울시 1인가구를 중심으로 2010년부터 10년간 뉴스 키워드의 사용빈도 추이에 관한 한 조사 따르면, 과거에는 결혼, 행복, 미혼 등 사회적 가치와 가정 관련 키워드가 주를 이뤘으나 최근에는 혼밥, 혼술, 취향, 1인 임대주택 등 간섭받지 않는 생활과 자신만의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형태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월간 서울동향 리포트 「‘지금은 ‘1인 가구’ 전성시대」, 서울연구원, 2019. 11.)
[6] 수잔 레이시(이영옥·김인규 옮김), 『지형 그리기: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 문학과과학,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