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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면 When the wind blows
- 황지윤 작업론
몽환적인 느낌의 자연 풍경들을 화면에 담는 황지윤 작가는 동서양의 고전화에서 사용되는 클리셰(cliché)를 차용하여 풍경화를 재해석하는 회화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그의 회화는 옛 민화, 중국의 산수화, 17-18세기 네덜란드 풍경화나 19세기 독일의 낭만주의 풍경화 등 우리 눈에 익숙한 고전적인 풍경화에서 보이는 정형화된 구도에서 많은 영감을 얻고 있다. 이 풍경화들의 전형적인 조형어법은 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안개가 휩싸인 험난한 산 속 깊은 계곡 등 거대한 스케일의 자연을 드라마틱한 표현을 통하여 긴장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그가 만든 풍경은 자연에 대한 보는 이의 경외심과 자연의 숭고미를 효과적으로 끌어낸다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회화 안에 이질적인 요소를 배치함으로써 화면 속 풍경을 낯설게 만들고자 (그리하여 다시금 주목하도록) 한다. 전형적인 산수화 구도인 전경, 중경, 후경을 따르고 있는 <풍경의 움직임>(2014년)이나 <검은 오름의 풍혈>(2014년)의 예처럼, 작가는 화면 곳곳에 가까이 할수록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요소를 장치해두어 있다. 멀리서 보면 흰구름 같지만 가까이 보면 새의 무리거나 풍성한 나뭇잎으로 보였던 것이 실은 청솔모 떼이고, 멀리서 보면 붉은 갯벌이나 암석으로 보이는 것들이 실은 꽃게 군집으로 구성되는 등 작가의 풍경은 고전의 풍경화가 지닌 익숙함 속에 새로움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화면 안에 몽환적인 느낌을 더하고 있다. 또한 회화 곳곳에 숨어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화면 안에서 주는 어색함을 최소화하고 풍경의 안정된 구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작가는 물감의 색을 제한하여 전체적인 색채가 균일하고 전체가 통일감이 있도록 하고 있다.
2011년 ‘둔갑술 풍경 shape-shifting landscape’ 개인전을 시작으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이게 하기’ 란 주제로 페인팅을 지속해온 작가는 이번 2014 금호영아티스트 전시에서 제주도의 풍경을 담은 근작 시리즈를 소개하여 진일보된 작가의 시각을 보여준다. ‘바람 불 면 When the wind blows’이라는 주제로 구성된 <바람 부는 곳>, <누워있는 풍경> 시리즈 등은 여전히 작가가 집중하는 풍경화의 클리셰들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재하는 공간을 대상으로 정교한 눈속임 작업을 통해 시각적인 환영을 만들어낸다. ‘바람’이라는 소재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자연풍경의 드라마틱한 기운을 증폭시키고 ‘이발소 그림’과 같은 형식적 전형성을 내재화시킨 출품작들은 시각적 잔상의 여운을 남기며 공포나 불안, 유희 같은 심리적 자극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이는 자연의 모습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도록 함으로써 시각적 다양성을 제시하는 한편, 특유의 작업방식으로 회화를 매개로 감상자와의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풍경화로 주목할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