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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발하는 순간들을 조우하며
안녕하세요.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쓸 줄은 저 역시 몰랐는데 혹시 당황하셨다면 송구한 말씀 먼저 전합니다. 이 글을 끝까지 읽고 나시면 왜 제가 당신에게 이 편지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으실 거예요. 놀라지 마세요. 오늘 저는 증인으로서 파편적인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그리하여 미결사건으로 남은 <클럽 리얼리티 Club Reality>에 관하여 몇몇 현장에서 제가 포착한 것을 당신께 전하려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되어라!
<클럽 리얼리티>의 룰은 매우 단순합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보는 것입니다. 가상의 정체성을 갖고 타인들과 만나고 교류하는 거예요. 당신 역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이곳에 입장하셨을 테죠. 약간 상기된 채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당신을 상상하면, 웃음부터 나네요. 전시장에 붙어있는 사진과 인터뷰 영상에 등장하는 11명의 인물들이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전시장에서 먹고 마시며 떠드는 그들과 함께 대화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새로운 페르소나로 무려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모이고 관찰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그런데 그들이 서로에 대해 이해하는 바를 증언하는 인터뷰 영상은 흥미로워요. 각자가 생각하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다 다르거든요. 그들이 가상의 ‘나’를 제대로 연기하지 못해서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최근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트릭 미러』(생각의 힘, 2021)를 쓴 저자 지아 톨렌티노(Jia Tolentino)는 본인이 10대 시절 출연했던 TV 리얼리티 쇼를 성인이 된 후 다시 찾아보고선 화들짝 놀라요. ‘빨리 먹기’ 게임에서 마요네즈를 먹지 못하는 저자가 매운 마요네즈 요리를 “자진해서”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장면이 있었거든요. 지금까지 뚜껑이 덮여 무슨 요리인지를 몰랐고 “어쩔 수 없이” 먹었다고 생각했던 저자는 자진해서 먹는 어린 나를 보며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과 같은 생경함을 느끼게 되지요. 그 챕터(‘2장 리얼리티 쇼와 나’) 전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자신의 다른 면, 서로를 다르게 기억하는 친구들의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어요. 성인이 되기 전 아직 아물지 않은 청소년 시기라서, 기억의 불완전성 때문에, 혹은 TV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연기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전시장의 인터뷰와 연결시켜놓고 보면 처음의 질문, ‘어째서 “단일한” 인물이 이렇게 다채로운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견고하게 만들어진 정체성이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애초에 없는 것은 아닐까요?
상상하고 둘러대면서 순간을 생성하라!
우리 모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다양한 관계와 상황, 환경이라는 무대 위에서 매번 다른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지금, 당신이 전시장에 서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인양하고 있는 것처럼요. 이건 제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 사회심리학자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말이에요. 인간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자신의 설정, 외모, 태도를 바꿔가면서 각각의 관계에게 적절한 인상을 형성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해요. 이를 ‘상황 정의(The Definition the Situation)’라고 부르죠.[1]50년도 넘은 이 사회심리학 이론을 언급하는 것은 “진짜” 자아란 허상에 불구하고 상황에 따른 “상황적” 자아들만 존재한다는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어서에요. 일터에서, 학교에서, 집에서 수행되는 사회적 역할에서부터 연인, 가족, 친구, 동료, 지인 등 내밀한 감정적인 영역에서 이르기까지 우리의 모습은 어떤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알게 모르게 다변화한다는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저는 작가의 시도가 일차적으로는 (고프먼의 책 부제이기도 한)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우리가 어떻게 연기하는가’를 <클럽 리얼리티>를 통해서 전략적으로 제시하려는 것은 아닌가 되묻게 돼요. 여기서는 프리랜서 CF작가, 누드모델, 대학 5학년, 이자카야 알바생, 고등학생 등 가상의 정체성을 (스스로) 설정하고 새로운 아이덴티티로 낯선 상황들을 매주 마주하게 돼요. 평상 시라면 본능적으로 작동할 자아 연출이 이곳에서는 매 순간 무너짐으로써 오히려 인지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관계 혹은 상황 안에서 삐그덕거리며 대응하고 틈을 메꿔나가며 미끄러지는 모습의 자기들이 출현하는 과정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사회 안에서 매 순간 반응하며 연기하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랄까요. 어떤 참여자는 “사실은 나의 삶 전체가 가짜인데, 나를 그대로 표현하면 될 텐데 그게 왜 어려운지...”라는 자조 섞인 글을 일기장에 적었더군요.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차원 더 나아가는 듯합니다. 11주간의 에피소드는 매회 특별한 상황을 제시하는데요. ‘마시다 만 술병들’ 에피소드를 그 예로 들어보죠. 숨기고 싶은 기억을 쪽지에 적고 제비뽑기 한 후 다른 사람의 기억을 마치 본인이 겪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이 골자예요. 쪽지에 적힌 몇 가지 단서를 갖고 즉흥적으로 상상해서 둘러대야 하는 것이죠. 기억이란 앞서 지아의 리얼리티 쇼 에피소드처럼 왜곡되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가상의 ‘나’가 만들어낸 기억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 그리고 타인의 상상을 통해 재구성되는 과정을 다시 거치게 되는 거죠. ‘과거의 경험(사실) → 왜곡된 기억 → 가상의 정체성에 의한 변주 → 타인의 상상으로 재구성’ 단계를 거치면서, 본질은 사라지고 그럴듯하게 둘러대는 상황만이 남게 되는거죠! 작가의 말로 대체하자면 “모든 데이터들은 손실되고 휘발되는” 것이죠. 재밌지 않나요? 결국 애초의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 단서들을 이어가며 허우적거리고 재조직하려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생성되고 창발하는 순간들의 번뜩임만이 중요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작가의 의도는 정체성이나 기억이라는 본질 자체가 아니라, 이것을 순간마다 다르게 창발시키는 관계들의 지형도를 포착하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클럽 리얼리티>와 상호참조적인 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 <Rabbit Hole 2052>(2022)의 경우 '프리퀄'이라는 설정을 갖고 있죠. 다시 말해, 본 편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상상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클럽 리얼리티> 역시 다섯 개의 코드와 600여 장의 현장 사진과 400페이지가량의 증언록, 200여 장의 그림과 인터뷰 등 무수한 기록으로만 존재하죠. 그 파편화된 증거로 구현된 전시장에서 우리는 <클럽 리얼리티>의 본질을 찾으려고 애쓰지만 무위로 그치며, ‘순간들’을 따라서 어렴풋이 유추해 볼 따름인 것이죠.
그/그녀의 일기를 매일 쓰라 그리고 만나고 교제하라!
<클럽 리얼리티>에서는 가상의 정체성을 유추해보기 위한 다양한 방식이 작동하고 있어요. 우선 증언록은 상상의 인물로 분한 참여자 본인이 쓴 일기입니다. 하루 10분씩 가상의 나를 반추하며 적어 나가도록 했죠. 그리고 ‘버디’라는 존재가 있어요. 모임기간 동안 서로를 관찰하고 본인을 대신해서 개인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참여자 여럿이 자신의 버디를 가리켜 ‘나의 거울’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일 겁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본질에 근접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는 관찰을 기반으로 합니다. 일종의 바라봄이죠.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완벽하고 통합적으로 대상(나 혹은 타인)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는 이와 대상 사이에는 언제나 일종의 괴리와 간극이 있기 때문이죠.
푸코(Michel Foucault)의 텍스트 「유토피아적인 몸(Le Corps Utopique)」(1966)에는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도입부가 나와요. 주인공이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본인의 육체를 확인하는 일상적인 모습이요.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행위는 얼마나 적확한 나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푸코는 한 강연에서 “거울 안의 나를 바라보는 순간 거울이 놓인 그 자리는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공간과 연결되어있다는 점에서 현실적이지만 그것이 지각되려면 [거울] 저편에 있는 가상의 지점을 통과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비현실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2]거울의 상으로서 인지하는 이미지는 실재와 가상이 뒤섞인 상태(헤테로토피아)라는 거죠. 따라서 이를 통해 인지된 몸이란 그 자체로 완결되거나 통합된 것이 아니라, 주위에 배치된 사물들과의 관계 속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보았어요. 즉 육체는 언제나 부분적으로 그리고 타자화 되어 생경하게 인지될 뿐이라는 거죠.
이러한 관점은 거울이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반영과 일루전을 제시하는 박관우 작가의 작업 면면에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낯선>(2013), <내일>(2014)과 같은 초기작에서부터 <타인>(2017),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해줘 1, 2>(2019)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거울, 잠망경, 스크린, 헤드셋 장치를 고안하여 다른 각도에서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거나 시간이나 장소적인 변주를 감행하죠. 이들은 모두 자기 인식의 고정된 틀과 경계를 순식간에 흔들어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본질이란 것은 실재하는가?’
위 규칙을 영구적으로 지속하라!
<클럽 리얼리티>는 가상의 정체성으로 분한 11명의 인물들이 매회 특별한 에피소드로 모여 “이상한 상황”을 연출합니다. 작가는 이 연극에서 상황을 연출하는 설계자이며, 참여자들과의 소통을 통해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산파이기도합니다. 또한 이 폐쇄적인 사교모임에서 생산된 무수한 증언들을 수집하고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재배열하는 역할을 하지요. 하지만 작가는 그 무엇도 통제하고 있지 않아요. 오히려 어떠한 계기와 자극을 마련할 뿐이지요. 참여자 사이에서 상호작용이 발생하고 개인의 실재와 가상이 뒤엉키면서 제3의 순간들이 창발되도록 독려하면서 말이죠. 여기서 “현실은 매 순간 실시간으로 새롭게 만들어집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모임이 다섯 개의 심플한 코드(와 14개의 시행세칙)를 중심으로 영구적으로 지속되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일련의 법칙으로서 최초에 생성되고 구성원들 간의 상호작용으로 변주하며 진화하는 형태지요. 가상의 정체성으로만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증언록은 온라인에 개방되어 유지되며, 간헐적인 만남은 작가 생애에 총 세번, 그러니까 앞으로 두번 더 개최되는 방식으로요. 물론 작가가 위임한 사람은 향후 모임을 진행을 할 권한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저에게 <클럽 리얼리티>는 생물과도 같이 자생한다고 생각되어요. 맨 처음 작가의 머리 속에서 하나의 개념으로 시작되었지만 그것이 진행되고 발화하는 전개방식은 지극히 수행적입니다. 미술관 안팎이라는 시공간적인 상황, 참여자들의 언어적이고 신체적인 소통방식, 일상적 차원에서의 담화와 기록 등 “아직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는 움직임과 변화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경향”들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럼으로써 이 작업에서는 “정체성은 타고나거나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행위하기’를 통해 변화하고 구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3]
아티스트 토크에서 작가와 마주친다면 크게 인사해보세요. <클럽 리얼리티>에서 작가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는 앞으로 두 차례 밖에는 없으니까요. 혹은 관객 중에 당신의 모습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거예요. 당황하지 말고 최대한 잘 둘러대시면서 순간을 모면해보세요, 내가 다른 누군가 인척. 한바탕 파티가 진행된 흔적처럼 보이시나요? 아니요. 여전히 그 파티는 진행 중에 있습니다.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그 파티에 참여하고 있답니다. 당신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상황 안에 머물면서, 상황을 변주하고 있어요. 우린 모두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입니다. 그리고 거울들이 나에게 말을 걸지요. “<클럽 리얼리티>는 상황을 생성하는 구조이며, 영구적으로 결론나지 않는 미결의 사건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거울입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있지만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습니다. 마시다 만 맥주가 식어버린 지 오래지만, 아무렴 어떤가요.
2022. 7.
창발하는 순간들을 조우하며
- 박관우 <클럽 리얼리티 >(2022) 작업론, SPACE* C *C-lab ‘공진화’
[1] 어빙 고프먼(진수미 역), 『자아 연출의 사회학』, 현암사, 2016/1956, p.14.
[2] 미셸 푸코(이상길 역), 『헤테로토피아』, 문학과지성사, 2014/1966~, p.48.
[3] 강수미, 『다공예술-한국 현대미술의 수행적 의사소통 구조와 소셜네트워킹』, 글항아리, 2020, pp.30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