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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가 있던 자리
- 송수민 작업론
SNS 뉴스피드에 실시간 쏟아지는 이미지들과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붙은 인터넷 포털의 기사들이 난무하는 온라인 플랫폼에서 개인의 생각은 빠르게 공유되지만 정작 말하고자 했던 것들이 쉽게 가려지기도 한다. 미디어에 중독된 세상에서 텍스트가 지닌 본래의 의미는 쉽사리 휘발되고 이미지는 밈과 짤 등으로 편집, 확대 재생산된다. 이는 텍스트와 이미지 일부가 원래의 자리에서 지워지거나 다른 것으로 대체되고 혹은 새로운 맥락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자리 [명사]
1. 사람이나 물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 2. 사람의 몸이나 물건이 어떤 변화를 겪고 난 후 남은 흔적. 3.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설비나 지정한 곳.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표준국어대사전
위의 사전적 의미로부터 자리가 지닌 뜻을 갈무리해보자면, 자리란 사물이나 사물이 공간에 점유하는 위치이자 남은 흔적, 지정된 장소이다. 이를 다시 풀어보자면 자리는 현재 존재하는 곳뿐만 아니라 상태의 변화를 유추할 수 있는 표식이자 암시로, 다양의 의미들로 연결된 공간에서 하나의 의미 지점을 차지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치된 포지셔닝까지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자리가 원래의 위치에서 이동하고 변화하도록 재구성되고 재배치되면서 전달되는 낯선 감각과 새로운 의미는 작가 송수민의 회화에서 주요하게 목격되는 지점이다.
원래의 이미지를 확대하거나 잘라냄으로써 이미지가 지닌 애초의 의미를 희석시키거나 비슷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작가가 지속적으로 회화의 조형성을 구현하기 위한 작업의 근간을 이룬다. <예기치 못한 상황>(2017), <인공파편>(2019)은 각각의 상황과 의미는 휘발되고 연기와 물이라는 “형상의 껍데기”로만 남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인공파편>의 경우는 특히 이미지의 한 부분을 잘라내어 더욱 극적으로 물인지 불인지 유추가 어려운 형상으로 재현된다.
최근작 <하얀 패턴>과 <초록 패턴>(2020)은 재난과 자연이라는 대비되는 속성의 이미지에서 유사한 형태를 뽑아내 보여준다. 작가는 전쟁터에서의 폭발이나 로켓 발사, 화재 등으로 만들어진 연기와 식물의 넝쿨이나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 등 내용상으로는 대비되면서 형태상으로 연결되는 조형들로 화면을 구축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포착된 이 이미지들은 정확한 사건 유추는 어려우나 폭발하고 쏟아지는 등 사건의 징후를 보여줌으로써 하나의 장면에서 앞뒤의 레이어로 파생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작가에 따르면 “회화의 화면으로 가져올 때 주로 선택하는 이미지는 대비되는 두 가지의 요소이다. 기존에 가지고 있는 내용은 반대되지만 조형적으로 유사한 형태이거나 사건 사고의 모습과 일상의 모습, 물과 불, 텅 빈 풍경과 무언가로 꽉 차 있는 풍경 등 두 가지의 대비되는 장면에서 몇 가지의 요소를 조형적인 부분 또는 몇 가지의 키워드로 추출해 작업하기 시작한다(2017년 작업노트 중).” 이 시도들은 조형성을 실험하는 어법에 주목하는 동시에 새로운 이야기를 생성해낸다.
비어있는 도형이나 자국은 사건의 직접성을 우회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역시 화면의 조형성과 연결된다. 풍경화 속 일정 부분이 지워지는 형태는 흔적으로서의 자국으로서 화면에 기록된다. 존재가 가려지거나 지워지는 것은 결국 존재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기존의 자리로서 의미를 인지하도록 함과 동시에 자리가 박탈당한 이미지들로 인해 화면 전체가 어떻게 읽힐 것인가에 관해 사유하도록 한다. <膜(막)> 시리즈(2017)와 <자국>(2018)이 대표적인 작업으로 “기억의 틈에서 생긴 오류로 인한 끊어지는 장면”을 구현하였다. <플라스틱 이파리> 시리즈(2016-2017), <empty flower>(2018-2019)에서는 화면 속 중심인물이나 사물을 비우거나 하얀색으로 메꾸면서 제작되었는데, 특히 <하얀자국>(2017-2019)은 초기에 <물불>(2017)에서는 물과 불의 연기가 조형적 요소로서 일정한 비움을 드러내다가 이후 본격적으로 여러 기하학적 도형들이 등장하여 화면의 일부 혹은 꽃과 같은 구성요소를 지워낸다. 작품 속 주요소재인 물과 불, 꽃과 같은 이미지는 색을 빼고 형태적으로 연결되기(<blooming pattern>, 2019)에 이르면서 본격적으로 의미가 탈락되고 패턴과 같은 시각적 조형성으로 전환된다. 화면 속 주인공인 새가 푸른색 도트나 흰색으로 지워짐으로 대체되고 지워진 작품(<새가 머문 자리>, 2019-2020) 역시 도트나 철조망이 일종의 패턴으로 읽히며 남은 흔적을 통해서 전혀 다른 차원의 의미를 생성하게 된다.
한편 <하얀조각으로 시작된 풍경>(2019)은 포스트잇과 같은 종이가 덧대진 것 같은 구성을 통해 화면 앞에 다른 레이어가 있는 듯한 착시를 준다. 최근작 <○○이 머문 자리>(2020)는 다양한 소재와 화면의 분절을 통한 풍경의 레이어들, 여러 시점과 거리감들의 혼재하는 작업으로, 여러 차원이 마치 한 화면 안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준다. 여기서 의미들은 서로 시너지를 만들면서 본래의 자리에서 미끄러지며 화면 안에서 긴장감을 유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파생시킨다.
작가는 미디어의 보도 이미지가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퇴색 혹은 왜곡되었던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화면 안에 있어야 할 이미지들을 자리에서 탈락시키거나 이동시킴으로써 발생하는 새로운 의미들에 주목한다. 그는 이미지들을 잘라내거나 확대하기, 지워내거나 비워두기, 덧대기 등의 방법으로 의미의 균열을 만든다. 자리를 뺏긴 이미지들이 포함된 화면은 “시간차를 두고 움직이는 가변적인 것이자 다르게 읽힐 여지”를 지니게 된다. 또한 사건이나 내용의 유추가 애매해진 이미지의 레이어를 화면 내부 혹은 캔버스 단위로 병치시킴으로써 이미지의 의미들이 서로에 의해 계속 미끄러지며 재구축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며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 2020년 금호창작스튜디오 비평워크숍 수록글 (202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