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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기계, 공진화하는 주체들
- 한이삭 <자명하지 않은 음악기계 A.I.: nUFO> 작업론
여기 악기와 연주자가 있다. 모든 이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현란한 기교와 정교한 선율이 한치의 오차 없이 벌어질 순간을 고대한다. 연주자에 의해 완벽히 길들여진 도구로서 ‘연주자-악기’의 관계를 기대했다면 한이삭의 연주는 당신에게 당혹감을 안길 것이다. 그의 음악기계는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생물’처럼,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메커니즘으로 소리를 만들어 낸다.
한이삭이 개발한 ‘A.I.(Airborne Instrument): nUFO’(이하 nUFO)는 연주자의 움직임과 손의 터치에 따라 전자 사운드가 실시간 합성 및 제어되며 작동하는 컴퓨터 기반의 악기이다. 연주자는 10개의 손가락으로 앞뒤면의 버튼을 건반처럼 누르는 동시에 ‘인터렉터 바디’라고 불리우는 납작한 공모양의 몸체를 움직이며 사운드를 발생시킨다. 그의 연주에서 악기가 생성하는 제너러티브 사운드는 행위자의 의도에 자명하게 반응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다른 nUFO에서 발생하는 사운드 및 메인 스테이션과의 송수신 피드백, 그리고 외부에서 개입하는 사운드적 요소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음악기계는 행위자와의 단독적이고 일차적인 관계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확장된 환경 시스템에 반응한다. 이로써 그의 작업 <자명하지 않은 음악기계 A.I.: nUFO>는 연주자(주체, 인간)와 악기(도구, 기계)에 대한 새로운 위상 및 관계의 재설정 차원에서 흥미로운 논점을 제공한다.
‘탈숙련화’된 행위자로서의 인간
음악에 있어서 우연성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존 케이지(John Cage)로부터 시작되는 20세기 실험음악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불확실성의 음악이 주는 감각을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연성이란 연주자에 의해 의도된 것이고 이를 시청하는 관객이 예측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므로 여전히 연주자는 악기 혹은 관객과의 관계에서 권력을 지니는 존재였다. 그러나 한이삭의 작업에서 행위자는 연주 의도가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상황을 마주한다. 예상할 수 없는 노이즈와 깨짐을 통해 놀람과 불편함이 발생되는 일종의 글리치(glitch) 현상이 수반되는 것이다. 따라서 nUFO에 있어서 숙련도는 연주의 성패를 가를 만한 잣대가 되질 못한다.
사실 그의 작업은 성공과 실패, 완성과 미완성, 전문가와 아마추어,예술가와 관객이라는 이분법적인 위계가 사라지는 것 자체를 의도한다고 볼 수 있다. ‘탈숙련화(deskilling)’된 행위자로서 예술가가 위치하는 순간, 예술은 ‘장인적인 테크닉’ 보다는 ‘개념(아이디어)’이 더 중요할 수 있고, 사회적이고 관계적인 맥락 안에서 이해될 필요성이 제기된다. 다시 말해, 순수하고 비범한 예술이라는 예술제도의 기존 프레임과 위상이 전복될 단초가 되는 것이다.[1] 여기서 관객은 단지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참여자이자 때로는 창작자가 될 수 있는 여지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위계적 관계의 고리가 해체되는 경험은, 궁극적으로는 복잡계가 이끄는 우연성의 연속들 속에서 타인 및 외부환경과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며, 단단한 자아의 껍질을 버리고 관계 안에서 상호주체성을 체감하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난다.
인간과 기계, 네트워크 속 동등한 행위자
본 작업에서는 음악기계 외에도 자동 구성 네트워크 ‘nUFOlogy’를 통해 사운드 환경을 조성하고 실험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2] nUFO가 행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사운드를 발생시키는 반면, nUFOlogy는 환경 안에서의 여러 소리 요소들을 감지하고 이에 반응한 사운드를 송출하는 시스템으로, 외부와 상호작용을 이루는 구조 자체라 볼 수 있다. 이 네트워크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은 ‘인공지능(A.I) 대신에 ‘아티피셜 에이전트’(A.A)라는 개념으로 더욱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스스로 학습하고 연산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인공지능과는 달리, 이 개념은 환경을 인식하고 적절히 반응하며 지속적으로 맞추어 나가는 작동방식이다. 이로써 ‘4차산업’과 ‘인공지능’에 대한 과도한 열망 속에서 ‘기계도 자율성을 갖는가’라는 오늘날의 화두와는 근본적인 거리를 둔다. 오히려 이 자동구성 네트워크를 통해 인간과 음악기계가 에이전시를 공유하며, 사운드를 협상하고 조율하는 과정에 더욱 집중한다.
이 지점에서 자명하지 않은 음악기계는 다시금 인간과 기계의 관계를 재편성한다. 도구에 머물던 기계가 여기서는 외부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일부분 판단을 내리고, 충돌과 불화를 넘나들며 외부와 소통하는 존재로서 위치한다. 또한 인간은 컴퓨터라는 인터페이스에 종속되는 방식에서 탈피하여, 신체적이고 직관적으로 알고리즘에 반응하면서 변화와 매개의 변수를 만드는 과정에 동참하게 된다. 따라서 기계는 인간과 마찬가지인 행위자이며, 사람이 타인의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처럼 기계도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3] 다시 말해서 이 네트워크 안에서 인간과 기계는 행위자로서 동등한 창작의 주체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통제라는 개념을 넘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4]
포스트휴먼 주체는 기술적으로 매개되고 확장된 “관계적 자아”로서 존재한다. 본 작업은 음악기계와 인간이 모두 행위자로서 본격적으로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의 질서를 창조함으로써, 인간과 기계가 주체와 도구라는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를 거부한다. 서로에게 반응하고 조율하며 사운드를 만들어가는 공진화적(coevolutionary) 관계에 관한 예술적 경험은 향후 인류가 비인간을 마주하고 대하는 태도와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
- 제로원데이 아카이빙 도록 수록글 (2021)
[1] 이러한 ‘탈숙련화’는 음악보다는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용어는 1981년 ‘Art & Text’에 실린 글(이언 번(Ian Burn)의 <60년대: 위기와 여파>)에서 처음 사용되었는데, 레디메이드와 같이 공산품 오브제가 예술작품의 “비범함”을 대체하는 미술 현상을 통해 기존 예술의 형식과 제도에 관한 반발을 훌륭하게 뒷받침해준다.
[2] 이 시스템은 알베르토 데 캄포(Alberto de Campo)와 하네스 횔즐(Hannes Hoelzl)과 함께 지속적으로 연구 개발하고 있는 네트워크 사운드 인스톨레이션이다.
[3]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네트워크에 관한 주목은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의 핵심과 맞닿아 있다. 이 이론에서는 인간의 독보적인 행위능력을 자부했던 근대 휴머니즘이 배제했던, 타자로 취급 받던 동물, 기계, 물질 등에 다시 주목함으로써,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보고자 한다. 박인찬, 「포스트 휴먼으로 가는 길: 인간과 기계의 공진화를 중심으로」, 『포스트휴머니즘의 쟁점들』(강우성 외 공저), 갈무리, 2021, pp.29-30.
[4] 한이삭은 뮤지션 알베르토 드 캄포(Alberto de Campo)의 격언 “Lose Control, gain influence”를 인용한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