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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장면들
- 신창용의 멀티버스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조커, 토르, 츄바카와 람보. 이들은 지나치게 대중적이고 엄청나게 상업적인 캐릭터들이다. 20세기의 미국 대중문화 부흥을 함께 한 ‘코믹스’에서 시작하여 오늘날 멀리플렉스 영화관을 접수하는 각종 히어로물로 이어지며, 이들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두의 삶에 침투해있다. 아이콘이 되어버린 존재들은 잘 알려진 만큼 “플랫한” 존재들이기도 하다. 삶의 고단함을 잠시 잊는 오락거리로서 대중매체와 미디어를 통해 지나치리 만큼 광범위하게 소비되는 그들은 그래서 얄팍하다. 익숙한 도상에는 눈이 쉽게 가지만 깊이있는 사유로 이어지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 익숙한 하나의 장면, 신창용 작가의 <Thor, Chewbacca, Rambo and Joker>(2022) 속 풍경에 등장하는 히어로들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하늘에 별이 총총 박힌 어느 밤 모닥불 앞에 모여앉은 이들은 라면을 끓여 먹고 사과를 깎는다. 그들 주위에는 맥주 한짝과 물담배가 놓여있고, 토르의 망치 묠니르가 바닥에 있다. 저 멀리 숲에는 위쳐의 주인공 ‘게롤트’가 이 장면을 훔쳐보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가? 보는 이를 당황하게 만드는 수상한 장면이다. 어떠한 연유로 이들이 함께 있는지 상황을 유추해보려는 사이 화면 속 인물들은 다시금 볼륨감을 갖는다.
맨 왼쪽에서 사과를 깎고있는 ‘람보’는 베트남 참전용사로서 지역마을에서 억울한 다툼을 가지는 인물이다(영화 <람보 1>).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저들이 먼저 시작했을 뿐이라고요.”라는 대사처럼, 1960~70년대 미국의 정치 상황 속에 인간병기로 활용되었던 젊은이들을 상징하며 당시 사회의 냉소를 비판한다. 기관총을 쏘아대는 액션의 이면에는 반전주의에 관한 시대적 정서가 드러난다. 한편 SF 영화의 본격적인 흥행을 알린 스타워즈는 미소 냉전 시대에 발발한 우주경쟁의 열기와 연결된다. ‘루크 스카이워커’, ‘한 솔로’와 함께 모험을 이어가는 외계인 종족인 ‘츄바카’는 검은 헬멧을 쓴 ‘다스 베이더’와 제국 일당을 물리친다. 이는 독일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 소련의 파시즘에 대항하고 군비와 기술력에서 우위를 선점하려는 미국의 시대정신과 맞닿는다. 미국 코믹스를 대표하는 양대산맥 DC 코믹스의 ‘조커’와 마블 코믹스의 ‘토르’는 또 어떠한가. 조커는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광대 출신의 아서 플렉이 겪는 삶의 고단함에서 파괴적 힘을 발견한다. 신이자 영웅으로 추대받던 토르는 지구로 추방당해 힘이 사라졌던 무력감에서 점차 깨어나며 천둥 번개를 치고 비바람을 부리며 자신의 힘을 되찾는다.
이처럼 이들 각자는 묵직한 세계관을 가진채 살아간다. 작가의 말대로 저마다 다른 ‘3고(고립, 고뇌, 고독)’를 겪으며 서사를 만들어 나간다. 체제와 계급에 대항하며 살아갈 존재이유를 각자 찾아 나선다. ‘멀티버스 프로젝트’라고 명명되는 이 일련의 작업들에서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인물들이 화면에 다같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만남에 의미를 찾으려는 당신의 시도는 미끄러진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교류나 상호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동공이 풀린 채(검은자위가 없다!) 그들은 그저 눈앞의 일에 몰두할 뿐이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는 질문한다. 다른 세계관의 존재들이 굳이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가의 작업 속 멀티버스의 의미를 살펴보기 전에 히어로물에 나오는 맥락을 우선 살펴보자면, 다중우주, 더 정확히 말하자면 평행우주를 뜻한다. 이는 ‘닥터 스트레인지’를 필두로 ‘스파이더맨3: 노웨어맨’ 등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며 영화 안으로 소환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평행우주 속 지구는 80만 개가 넘는다.(예를 들면 무법천지의 황무지에서 늙은 울버린의 삶을 그린 ‘올드맨 로건’의 세계는 ‘807128’ 숫자가 달린 지구이다.) 또한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포켓디멘션’과 같은 다른 차원의 세계도 존재한다. 이처럼 히어로물에서는 다른 차원 간의 간섭 및 교류가 가능한 세계를 구현한다. 이를 설득하기 위해 다른 사건이 일어나는 여러개의 다중우주가 무한하게 존재한다는 ‘다중우주론’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같은 모습을 가지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우주가 수없이 많이 존재한다는 ‘평행세계’가 추가되며 시공간을 가볍게 뛰어 넘는다. 이를 통해 스토리가 무한하게 확장되며 소비되도록 한다.
그렇다면 작가가 활용하는 멀티버스의 전략은 무엇일까. 여기서는 등장 캐릭터가 지닌 고유의 서사를 뒤섞어 버리며 새로운 내러티브를 생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 예상 밖의 조우와 얽힘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이 주는 의외성은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 특유의 ‘위트’와 연결된다. 예를 들면 아놀드 뵈클린(Arnold Bocklin)의 <죽음의 섬>(1880~1886)을 패러디한 작품 <Into the Arnold Bocklin’s Painting>(2020)에서는 원작의 침울한 분위기와 대조되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 대신에 ‘이소룡’을 앞세우고, 남편의 관 대신에 무기상자를 둔다. 배가 향하는 섬은 새로운 미션을 진행하는 게임의 무대가 된다. ‘죽음’과 ‘장례의식’이라는 기존의 서사는 작가가 투입한 인물들과 만나며 새로운 층위, 다시 말해 이별의 슬픔이 주는 침묵이 게임이 펼쳐질 설레임과 흥분으로 대체된다.
한편 <The Last Supper>(2022)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1495-1497)의 유명한 도상을 가져온다. 여기서는 예수와 열두 제자 대신에 빌런들이 자리한다. 식탁 위 라면 그릇들은 텅 비어있고 라면을 먹고 있는 예수 ‘조커’와 의심하는 도마 대신에 ‘핑거스냅(우주생명체의 절반을 몰살시키는 힘을 작동시키는 제스처)’하는 ‘타노스’, 예수 쪽으로 얼굴을 쭉 뺀 베드로 자리에는 ‘베놈’이 혀를 낼름거리고 있다. ‘예수를 팔아넘긴 자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은 ‘언제까지 먹을건데?’라는 일상의 물음으로 대체되는 듯 하다.
히어로와 빌런은 이미지가 소비되는 시대의 중심에 있다. 멀티버스는 그들의 소비를 가속화하며 전략적으로 미디어에서 활용된다. 그러나 신창용의 회화에서 인물들이 얽히는 풍경은 기존의 이미지나 시퀀스의 일부를 반복, 재생산하며 재맥락화한다. 그들을 기존의 이미지 그대로 소비하는 대신 인식의 틀을 바꾸는 행위의 과정으로 매개한다. 이러한 패러디의 전략은 전작에서도 포착된다. 각 인물이 원래의 시공간에서 보여지는 작업들(2015년 작 <Bruce Lee and Car>, <Give me Water> 등)이 주를 이루었지만, 작가 본인이 종종 화면에 등장했다. 다시 말해 작가의 세계와 히어로의 세계가 캔버스 안에서 조우하며 개념적으로 접점을 이루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작업이 애초부터 다른 세계관 속 존재들이 만나는 무대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점차 캐릭터들로만 화면이 채워진 이유는 히어로와 작가가 (작가에게) 동일시되면서부터다. 결국 ‘멀티버스 프로젝트’에는 히어로, 빌런과 작가 본인이 각자의 세계관을 허물며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보는 이에게 새로운 인식의 지평 속으로 초대한다.
- H아트랩 2기 레지던시 아카이빙북 수록글(2023)